님아, 그 강을 건너시오
강가에 한 여자가 보인다. 여자는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서 있고 흰 티셔츠와 청바지의 편안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얼굴은 고왔지만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눈은 저 멀리 한 곳을 바라보듯 초점이 없고 입은 짧은 탄식을 뱉어내듯 살짝 벌어져 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한 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정장 차림이다. 목까지 채운 흰 셔츠와 검은 넥타이, 검은 바지, 검은 외투 그리고 검은 구두까지. 누가 봐도 장례식장이나 갈 법한 모습이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남자의 모습 때문에 그의 옷차림은 더 도드라져 보인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눈의 초점은 없고 검은 뿔테 안경은 아무렇게나 얼굴에 걸쳐 있다.
여자가 강 건너의 남자를 불렀다. 하지만 남자는 멍하니 서 있을 뿐 여자의 말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남자의 표정에서는 무엇 하나 읽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분노도.
남자가 강가에 한 발짝 다가섰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소리쳤다. 하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여자는 입에 손을 모아 소리를 쳤지만 역시 남자는 들을 수 없었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발은 강물에 빠질 참이었다.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고 오열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주변은 강물 흐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남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워있지도 엎드려 있지도 않은, 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성인 남자 네 명 정도가 나란히 서 있으면 꽉 찰만한 작은 돌길이 끝도 없이 오르막으로 펼쳐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바다인지 강인지 모를 넓이의 검은 물이 얕은 출렁임과 함께 잔잔한 파도를 만들었다.
돌길 양옆에는 2층 또는 3층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집들의 지붕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휘어 있었다. 1층도 그렇지만 2층이나 3층에는 사람이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지붕 너머의 하늘을 쳐다봤을 때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검고 푸른 하늘에 별들이 촘촘하게 붙어 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경이로움을 넘어 공포 그 자체였다. 살면서 밤하늘의 그런 별빛을 본 적이 없기에 지금 보이는 하늘은 밤하늘이 아닌 우주 자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이런 풍경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남자는 결국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뭐, 자기 발로 강물에 뛰어들었으니 죽은 건 명백했다. 죽으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기 발로 스스로 강물로 들어가 자살한 기억이 똑똑히 기억났다. 입과 코로 들어오는 물. 어느 순간 닿지 않는 발. 허우적대는 팔과 다리. 막혀오는 숨. 입을 벌렸지만 괴상한 소리만 날 뿐 더욱 죄어오는 가슴. 하지만 올라가기보다는 내려가겠다는 의지. 결국 그렇게 차가운 강 위에 떠 올랐다. 물론 숨을 거둔 채.
하지만 사후 세계는 남자가 생각했던 거와는 매우 달랐다. 누군가의 앞에 끌려가 무릎을 꿇리고 재판을 받고 죽을 때까지(이미 죽었지만)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곳을 상상했는데 지금은 너무도 평온했다.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길을 따라 언덕 위로 걸었다. 분명 길은 언덕이었고 엄청 가파를 거로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완만했다. 아마 양옆의 집들 때문에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돌길 양옆의 집들은 기하학적으로 지붕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아니, 꼬부라져 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마치 산타 나라의 초록 난쟁이들이 쓰는 고깔모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붕의 색이 화려했다. 벽은 흰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지붕만큼은 알록달록 눈이 부셨다.
그렇게 몇 집을 지나 나무 간판에 맥주잔이 그려진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 옆에 난 창을 통해 집 안쪽을 들여다봤다. 국적과 인종을 알 수 없는 여러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집 안의 넓이가 이상하게 넓게 느껴졌다. 저 많은 사람과 테이블이 이 집에 모두 들어갈 수는 없어 보였는데 이상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 한가지는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이건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건 그들이 하는 말소리가 모두 한국어로 들렸다. 입 모양을 보면 그들의 모국어를 하는 것 같은데, 집 밖이라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한국어였다.
그러다 까만 피부를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손짓하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는지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도 일제히 손을 들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남자는 머뭇거리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밖의 크기와 집 안의 크기를 굳이 비교하자면 100배는 넓어 보였다. 그 정도로 집 안은 이상하리만치 넓고 천장은 매우 높았다.
처음 손짓했던 남자가 뛰어오더니 남자의 손을 끌고는 자신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안내했다. 남자가 빈자리에 앉자 누군가 흰 거품이 가득 담긴 맥주잔을 놓고 사라졌다. 정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 친구들. 여기 또 새로운 영혼이 방황하고 있다네.”
남자를 안내했던 검은 피부의 남자가 잔을 들며 말을 했다.
“가엾은 영혼에 축배를 들자! 가엾은 영혼에 안식을 주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잔을 들고 소리쳤다. 남자는 어리둥절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잔을 들어야 할 것 같아 얼굴 높이 정도로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마셔라! 마셔라! 모두 잊고 마셔라!”
남자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입도 떼지 못한 채 눈을 살며시 치켜뜨고 눈치를 보니 모두 남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눈을 딱 감고 맥주잔 바닥이 보일 정도로 잔을 기울여 한 번에 맥주를 마셨다.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더니 자신들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남자의 앞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고 한기가 도는 낡은 집 테이블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고 천장 여기저기에는 거미줄이 처져 있었다. 물론 집의 크기도 원래 크기 그대로였다.
살짝 취기가 있는 걸로 봐서는 술을 마신 건 분명한데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남자는 지금 상황이 매우 이상했지만 어차피 이 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의자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섰다. 그가 일어서자 엉덩이에서 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렇게 길을 따라 올라가다 또 다른 집 앞에 멈춰 섰다. 집 안에는 노인 한 명이 촛불을 켜 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노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손님이 오셨네… 이리 와서 앉아요.”
노인은 바느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주방으로 가서 쟁반에 차와 과자를 내왔다. 남자는 노인이 건네주는 찻잔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이상하죠?”
남자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포근한 인상의 백발노인은 북유럽 사람을 연상케 했다.
“나도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그랬어요. 이상하고 어색하고… 하지만 이렇게 적응해서 잘살고 있지요. 하지만 이 집을 나설 때가 되면 나는 없을 거예요. 이곳은 그런 곳이에요. 안타깝지만 그저 스쳐 지나갈 뿐 한 번 만난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 집 안에는 여러 사람이 공존해 있는 거죠. 운이 좋다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정말이지 힘들 거에요.”
남자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노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먼지가 겹겹이 쌓인 테이블 위에는 낡은 찻잔 세트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찻잔을 쟁반 위에 올려놓고는 집을 나섰다. 그렇게 한참을 또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창문에는 네 명의 남자가 원형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을 본 남자는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손은 벌벌 떨렸고 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턱을 떨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는 몇 번이고 눈물을 훔치고 창문을 노려봤다.
그놈이다. 그놈이야. 음주운전을 하고 내 아내를 치어 죽인 그놈이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네 명의 남자들은 이미 만취 상태였고 남자가 말한 그놈은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 테이블로 가져오고는 남자에게 앉으라고 했다.
“여어~ 형씨도 한잔하시려고? 낄낄. 술이라면 마음껏 마실 수 있다고. 끄어어! 취한다!”
음주운전을 하고 내 아내를 치어 죽여놓고, 심지어 자기도 죽었으면서 또 이렇게 술을 퍼마시다니. 남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노를 표출하기도 전에 네 명의 사람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남자는 털썩 소리가 나게 무릎을 꿇었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오열했다. 복수해야 했다. 복수해야 했어! 그놈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그놈을 만난 후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집들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자신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던 노인의 말처럼 그놈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이곳은 시간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며칠이,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어도 천 번 이상은 문을 열었다 닫았다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나 많은 집의 문을 열었는지 모를 날이 지난 그 날도 남자는 어느 집 문을 열고 들어갔고 백발의 노인이 시계를 고치고 있었다.
“시계 고치러 왔소?”
노인은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고 남자는 그놈이 아닌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집을 나가려고 뒤돌아섰다.
“허허~ 뭐가 그렇게 급하시오. 좀 앉았다 가시오.”
노인은 테이블 한쪽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고 노인을 바라보다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를 끌어내고 걸터앉았다.
“당신 눈은 말이오… 분노가 가득하구려. 나는 미세한 부품들을 가지고 있는 시계를 고치는 사람이라 그 누구보다 관찰력이 뛰어나오… 그런데 당신은… 그런 관찰력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몸에서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구려….”
노인은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들어오자마자 나가려고 하는 걸 보니 이 세계의 법칙은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려. 그리고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다니고 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않소? 지금쯤 나는 사라지고 없어져야 하는데 이렇게 여전히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흘렀는데 여전히 노인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집안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나는 이 세계에 오래 있으면서 시간을 멈추는 법을 알아냈소. 하지만 이 방법은 한 사람당 한 번밖에는 쓸 수 없소.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그 방법을 알려준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한 번밖에 시간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소리요. 만약 두 명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 어떡하겠소?”
남자는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여러 손목시계 중 하나를 집고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복수를 위해서는 그놈을 만나 죽여야 한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눈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으니 그놈을 확실하게 죽이려면 시간을 멈춰야 했다.
하지만 만나자마자 바로 죽인다면 시간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 그럼 그 시간은? 자신의 아내에게 쓰면 된다. 남자는 그놈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집을 뒤지고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아내를 만나기 위함도 있었다.
하지만 놈을 죽이는 데 실패한다면? 또다시 영겁의 시간을 그놈을 찾아다니는 데 써야 한다. 물론 그사이에 아내를 만난다면 모든 게 끝나겠지만 놈에게 복수는 하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내 옛 모습을 보는 것 같구려… 하지만 결국에는 선택해야 할게요… 그 선택이 옳든 틀리든 간에….”
노인은 말을 끝내고는 서랍에서 작은 회중시계를 꺼내 남자 앞에 내려놨다.
“그 시계의 버튼을 누르면 만난 사람과의 시간은 멈추게 되오. 부디 잘 쓰길 바라오.”
남자는 노인에게 왜 자신을 도와주는지 물었다.
“당신이 누굴 찾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찾는 사람을 결국에는 찾지 못했소. 아니, 어쩌면 찾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소. 이곳에 오래 있다 보면 당신같이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되오. 그들의 사연 대부분은 기구하기 짝이 없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오.”
노인은 말을 마치고 가 보라며 손짓을 하고는 다시 시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회중시계를 챙겨 일어나 문을 나섰다. 남자가 힐끗 뒤돌아봤지만 노인은 여전히 시계 고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집을 나서고 창문을 바라보니 노인은 집 안에 없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장소는 집 안에 한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길 한쪽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노인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을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고 했다. 시간을 멈추는 방법까지 알아낸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정말이지 오랜 시간 동안 있었을 거다. 그런 그도 결국에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은 찾지 못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찾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아닐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던 걸까? 나는 결국 아내를 만나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놈에게 복수하는 데 전념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확실한 건 없다. 노인에게 더 정확한 걸 물어볼까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는 벤치에서 일어나 다른 집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인간 세계였으면 몇 번을 환생했을 시간이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환생 따위 있지도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집을 들락거렸고 그놈도, 자신의 아내도 발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서도 다시 만난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라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죽은 사람의 수가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점점 지쳐갔다. 어떠한 물리적 고통도 없는 곳이었지만 그냥 지쳐갔다. 영혼이 되어서도 정신적 고통은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지쳐 갈 무렵 어느 집 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는 책상에 놓인 노트북을 보고 있었는데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하루라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 하지만 당신은 이곳에 올 수 없다는 것도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내 앞에 왔다는 건… 결국 나 때문에 죽음을 택했구나.”
남자는 울먹임을 멈추고 아니라고 말했다. 이건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내가 선택해서 이곳에 온 거라고.
“알아. 당신 탓을 하는 게 아니야. 모든 건 내 탓이야. 그날 그렇게 차를 몰고 나가지 않았다면 그런 사고도 당하지 않았겠지.”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니라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때 노인이 준 시계가 생각났다. 남자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버튼을 누르려 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의 노인을 만났구나. 나도 만난 적 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지만… 지금의 시간을 멈출 수는 없어. 우리는 결국 만날 수 없는 사이야.”
여자는 남자의 품에 시계를 다시 넣어줬다.
“그 시간은 당신을 위해 써야 해. 그 답은 당신이 찾아야 하겠지. 나는… 그냥 지금 당신의 모습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영원히 사랑할 거야. 그리고 당신을 잊지 못할 거야.”
남자가 눈을 떴을 때는 따뜻한 그녀의 체온은 사라진 뒤였다. 집 안에는 혼자 마룻바닥에 앉아 청승맞게 울고 있는 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마룻바닥을 손바닥으로 짚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째서 시계의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가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원하는 아내를 만났는데 왜! 어째서!
한참을 울던 남자는 울음을 그쳤다. 그는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여전히 우주인지 밤하늘인지 모를 곳의 별들은 반짝였다.
아내는 나를 위해 시간을 쓰라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일까? 만약 아내도 나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다면 시계 버튼 누르는 걸 막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분명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남자는 어쩌면 내가 미쳐버려서 환영을 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체온과 향기는 잊을 수 없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터벅터벅 길을 걷던 남자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들어왔다. 시계를 고치고 있는 노인. 그는 노인이 앉아 있는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 그때 그 사람이구려. 이리 와서 앉구려.”
노인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남자에게 손짓했다. 남자는 의심 가득한 눈을 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노인 혼자 사는 곳이라 대접할 것도 없고 미안하구려.”
노인은 고치던 시계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는 남자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마 놀랬을게요. 그 누구도 한 번 이상 만나본 적이 없는데 내가 보였으니.”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이 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노인이오. 나를 부른 명칭이 따로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다들 나를 시간의 노인이라고 부를 뿐이오. 이곳에 온 영혼들은 꼭 한 번은 나를 만나게 되어있소. 당신도 예외는 아니었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했던 것처럼 그 시계를 줬소. 아, 물론 모두에게 그 시계를 주는 건 아니오.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시계를 가질만한 영혼에만 줬소. 어찌 됐든 난 당신에게 시계를 줬고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소. 아니, 그 이전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시계를 받았던 사람들 모두 나를 다시는 만날 수 없었소. 그렇다는 이야기는 모두 그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는 거요.”
남자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그럼 아내를 만나게 한 것도 노인이 한 일이냐고 물었다.
“물론이오. 당신 자력으로는 아내를 절대 만날 수 없소. 아마 아내도 이런 사실을 몰랐겠지만, 그래서 단순히 죽으면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겠지만 죽음에도 종류가 있소. 당신은 자살한 영혼. 즉, 타락한 영혼이오. 아내하고는 절대 만날 수가 없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보고 싶어 그 시계를 주고 아내를 만나게 했소.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은 그 시계의 버튼을 누르지 않았소. 누를 시간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오. 그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버튼을 눌렀소. 심지어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시계를 뺏은 사람을 구타하면서까지 뺏어 눌렀단 말이오.”
남자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 시계는… 일종의 내가 행하는 시험이자 시련이오. 그리고 지금껏 아무도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없었소. 하지만 당신은 그 시험을 통과했소. 분명 시험이라고 했으니 상이 있을 테고… 그러면 상이 뭔지 궁금할 거요. 아내를 만나게 해주나? 영원히? 또는 복수하게 해주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이 세계도 법칙이라는 게 있고 나 역시 높으신 분 밑에서 일을 할 뿐이오. 하지만… 내가 법칙 좀 살짝 어겨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윗분들도 크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것 같소. 눈 좀 감아주면서 내 은퇴 선물이라고 생각하시겠지. 안 그렇소?”
말을 마친 노인은 자신의 조끼 주머니에 들어있던 회중시계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집 밖을 보라고 남자를 향해 턱을 살짝 들어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쳐다봤다. 맞은편 집 창문에 익숙한 뒷모습의 여인이 보였다. 분명 아내였다. 남자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의 팔목을 지그시 잡고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남자는 맞은편 집과 노인을 번갈아 보다가 몸을 돌려 노인을 향해 앉았다.
“말했지만 당신은 절대 아내를 만날 수 없는 영혼이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요. 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이곳의 임무를 성실히 한다면… 글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날게요. 난 그렇게 생각하오.”
노인은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린 외투를 손으로 탁탁 먼지를 털어내고는 입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모자걸이에서 모자를 머리에 쓰고는 남자를 향해 돌아보고 말했다.
“이제 내가 이 집을 나서면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오. 즉, 나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관리하는 거요. 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요. 이곳은 그런 곳이니까.”
노인은 모자챙을 잡고 고개를 살짝 내리며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창문 밖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는 이 세계의 관리자가 됐다. 남자는 과연 아내를 만나게 될까? 그놈에게 여전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남자의 맞은편 집에는 긴 생머리를 하고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젊은 여인이 살고 있었고 여전히 초침이 움직이는 회중시계를 책상 위에 둔, 창문 밖을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한 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정장 차림이다. 목까지 채운 흰 셔츠와 검은 넥타이, 검은 바지, 검은 외투 그리고 검은 구두까지. 누가 봐도 장례식장이나 갈 법한 모습이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남자의 모습 때문에 그의 옷차림은 더 도드라져 보인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눈의 초점은 없고 검은 뿔테 안경은 아무렇게나 얼굴에 걸쳐 있다.
여자가 강 건너의 남자를 불렀다. 하지만 남자는 멍하니 서 있을 뿐 여자의 말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남자의 표정에서는 무엇 하나 읽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분노도.
남자가 강가에 한 발짝 다가섰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소리쳤다. 하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여자는 입에 손을 모아 소리를 쳤지만 역시 남자는 들을 수 없었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발은 강물에 빠질 참이었다.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고 오열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주변은 강물 흐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남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워있지도 엎드려 있지도 않은, 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성인 남자 네 명 정도가 나란히 서 있으면 꽉 찰만한 작은 돌길이 끝도 없이 오르막으로 펼쳐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바다인지 강인지 모를 넓이의 검은 물이 얕은 출렁임과 함께 잔잔한 파도를 만들었다.
돌길 양옆에는 2층 또는 3층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집들의 지붕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휘어 있었다. 1층도 그렇지만 2층이나 3층에는 사람이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지붕 너머의 하늘을 쳐다봤을 때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검고 푸른 하늘에 별들이 촘촘하게 붙어 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경이로움을 넘어 공포 그 자체였다. 살면서 밤하늘의 그런 별빛을 본 적이 없기에 지금 보이는 하늘은 밤하늘이 아닌 우주 자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이런 풍경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남자는 결국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뭐, 자기 발로 강물에 뛰어들었으니 죽은 건 명백했다. 죽으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기 발로 스스로 강물로 들어가 자살한 기억이 똑똑히 기억났다. 입과 코로 들어오는 물. 어느 순간 닿지 않는 발. 허우적대는 팔과 다리. 막혀오는 숨. 입을 벌렸지만 괴상한 소리만 날 뿐 더욱 죄어오는 가슴. 하지만 올라가기보다는 내려가겠다는 의지. 결국 그렇게 차가운 강 위에 떠 올랐다. 물론 숨을 거둔 채.
하지만 사후 세계는 남자가 생각했던 거와는 매우 달랐다. 누군가의 앞에 끌려가 무릎을 꿇리고 재판을 받고 죽을 때까지(이미 죽었지만)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곳을 상상했는데 지금은 너무도 평온했다.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길을 따라 언덕 위로 걸었다. 분명 길은 언덕이었고 엄청 가파를 거로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완만했다. 아마 양옆의 집들 때문에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돌길 양옆의 집들은 기하학적으로 지붕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아니, 꼬부라져 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마치 산타 나라의 초록 난쟁이들이 쓰는 고깔모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붕의 색이 화려했다. 벽은 흰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지붕만큼은 알록달록 눈이 부셨다.
그렇게 몇 집을 지나 나무 간판에 맥주잔이 그려진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 옆에 난 창을 통해 집 안쪽을 들여다봤다. 국적과 인종을 알 수 없는 여러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집 안의 넓이가 이상하게 넓게 느껴졌다. 저 많은 사람과 테이블이 이 집에 모두 들어갈 수는 없어 보였는데 이상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 한가지는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이건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건 그들이 하는 말소리가 모두 한국어로 들렸다. 입 모양을 보면 그들의 모국어를 하는 것 같은데, 집 밖이라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한국어였다.
그러다 까만 피부를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손짓하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는지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도 일제히 손을 들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남자는 머뭇거리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밖의 크기와 집 안의 크기를 굳이 비교하자면 100배는 넓어 보였다. 그 정도로 집 안은 이상하리만치 넓고 천장은 매우 높았다.
처음 손짓했던 남자가 뛰어오더니 남자의 손을 끌고는 자신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안내했다. 남자가 빈자리에 앉자 누군가 흰 거품이 가득 담긴 맥주잔을 놓고 사라졌다. 정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 친구들. 여기 또 새로운 영혼이 방황하고 있다네.”
남자를 안내했던 검은 피부의 남자가 잔을 들며 말을 했다.
“가엾은 영혼에 축배를 들자! 가엾은 영혼에 안식을 주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잔을 들고 소리쳤다. 남자는 어리둥절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잔을 들어야 할 것 같아 얼굴 높이 정도로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마셔라! 마셔라! 모두 잊고 마셔라!”
남자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입도 떼지 못한 채 눈을 살며시 치켜뜨고 눈치를 보니 모두 남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눈을 딱 감고 맥주잔 바닥이 보일 정도로 잔을 기울여 한 번에 맥주를 마셨다.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더니 자신들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남자의 앞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고 한기가 도는 낡은 집 테이블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고 천장 여기저기에는 거미줄이 처져 있었다. 물론 집의 크기도 원래 크기 그대로였다.
살짝 취기가 있는 걸로 봐서는 술을 마신 건 분명한데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남자는 지금 상황이 매우 이상했지만 어차피 이 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의자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섰다. 그가 일어서자 엉덩이에서 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렇게 길을 따라 올라가다 또 다른 집 앞에 멈춰 섰다. 집 안에는 노인 한 명이 촛불을 켜 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노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손님이 오셨네… 이리 와서 앉아요.”
노인은 바느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주방으로 가서 쟁반에 차와 과자를 내왔다. 남자는 노인이 건네주는 찻잔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이상하죠?”
남자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포근한 인상의 백발노인은 북유럽 사람을 연상케 했다.
“나도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그랬어요. 이상하고 어색하고… 하지만 이렇게 적응해서 잘살고 있지요. 하지만 이 집을 나설 때가 되면 나는 없을 거예요. 이곳은 그런 곳이에요. 안타깝지만 그저 스쳐 지나갈 뿐 한 번 만난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 집 안에는 여러 사람이 공존해 있는 거죠. 운이 좋다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정말이지 힘들 거에요.”
남자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노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먼지가 겹겹이 쌓인 테이블 위에는 낡은 찻잔 세트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찻잔을 쟁반 위에 올려놓고는 집을 나섰다. 그렇게 한참을 또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창문에는 네 명의 남자가 원형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을 본 남자는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손은 벌벌 떨렸고 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턱을 떨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는 몇 번이고 눈물을 훔치고 창문을 노려봤다.
그놈이다. 그놈이야. 음주운전을 하고 내 아내를 치어 죽인 그놈이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네 명의 남자들은 이미 만취 상태였고 남자가 말한 그놈은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 테이블로 가져오고는 남자에게 앉으라고 했다.
“여어~ 형씨도 한잔하시려고? 낄낄. 술이라면 마음껏 마실 수 있다고. 끄어어! 취한다!”
음주운전을 하고 내 아내를 치어 죽여놓고, 심지어 자기도 죽었으면서 또 이렇게 술을 퍼마시다니. 남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노를 표출하기도 전에 네 명의 사람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남자는 털썩 소리가 나게 무릎을 꿇었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오열했다. 복수해야 했다. 복수해야 했어! 그놈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그놈을 만난 후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집들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자신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던 노인의 말처럼 그놈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이곳은 시간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며칠이,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어도 천 번 이상은 문을 열었다 닫았다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나 많은 집의 문을 열었는지 모를 날이 지난 그 날도 남자는 어느 집 문을 열고 들어갔고 백발의 노인이 시계를 고치고 있었다.
“시계 고치러 왔소?”
노인은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고 남자는 그놈이 아닌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집을 나가려고 뒤돌아섰다.
“허허~ 뭐가 그렇게 급하시오. 좀 앉았다 가시오.”
노인은 테이블 한쪽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고 노인을 바라보다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를 끌어내고 걸터앉았다.
“당신 눈은 말이오… 분노가 가득하구려. 나는 미세한 부품들을 가지고 있는 시계를 고치는 사람이라 그 누구보다 관찰력이 뛰어나오… 그런데 당신은… 그런 관찰력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몸에서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구려….”
노인은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들어오자마자 나가려고 하는 걸 보니 이 세계의 법칙은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려. 그리고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다니고 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않소? 지금쯤 나는 사라지고 없어져야 하는데 이렇게 여전히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흘렀는데 여전히 노인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집안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나는 이 세계에 오래 있으면서 시간을 멈추는 법을 알아냈소. 하지만 이 방법은 한 사람당 한 번밖에는 쓸 수 없소.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그 방법을 알려준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한 번밖에 시간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소리요. 만약 두 명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 어떡하겠소?”
남자는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여러 손목시계 중 하나를 집고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복수를 위해서는 그놈을 만나 죽여야 한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눈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으니 그놈을 확실하게 죽이려면 시간을 멈춰야 했다.
하지만 만나자마자 바로 죽인다면 시간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 그럼 그 시간은? 자신의 아내에게 쓰면 된다. 남자는 그놈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집을 뒤지고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아내를 만나기 위함도 있었다.
하지만 놈을 죽이는 데 실패한다면? 또다시 영겁의 시간을 그놈을 찾아다니는 데 써야 한다. 물론 그사이에 아내를 만난다면 모든 게 끝나겠지만 놈에게 복수는 하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내 옛 모습을 보는 것 같구려… 하지만 결국에는 선택해야 할게요… 그 선택이 옳든 틀리든 간에….”
노인은 말을 끝내고는 서랍에서 작은 회중시계를 꺼내 남자 앞에 내려놨다.
“그 시계의 버튼을 누르면 만난 사람과의 시간은 멈추게 되오. 부디 잘 쓰길 바라오.”
남자는 노인에게 왜 자신을 도와주는지 물었다.
“당신이 누굴 찾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찾는 사람을 결국에는 찾지 못했소. 아니, 어쩌면 찾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소. 이곳에 오래 있다 보면 당신같이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되오. 그들의 사연 대부분은 기구하기 짝이 없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오.”
노인은 말을 마치고 가 보라며 손짓을 하고는 다시 시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회중시계를 챙겨 일어나 문을 나섰다. 남자가 힐끗 뒤돌아봤지만 노인은 여전히 시계 고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집을 나서고 창문을 바라보니 노인은 집 안에 없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장소는 집 안에 한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길 한쪽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노인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을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고 했다. 시간을 멈추는 방법까지 알아낸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정말이지 오랜 시간 동안 있었을 거다. 그런 그도 결국에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은 찾지 못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찾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아닐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던 걸까? 나는 결국 아내를 만나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놈에게 복수하는 데 전념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확실한 건 없다. 노인에게 더 정확한 걸 물어볼까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는 벤치에서 일어나 다른 집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인간 세계였으면 몇 번을 환생했을 시간이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환생 따위 있지도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집을 들락거렸고 그놈도, 자신의 아내도 발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서도 다시 만난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라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죽은 사람의 수가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점점 지쳐갔다. 어떠한 물리적 고통도 없는 곳이었지만 그냥 지쳐갔다. 영혼이 되어서도 정신적 고통은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지쳐 갈 무렵 어느 집 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는 책상에 놓인 노트북을 보고 있었는데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하루라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 하지만 당신은 이곳에 올 수 없다는 것도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내 앞에 왔다는 건… 결국 나 때문에 죽음을 택했구나.”
남자는 울먹임을 멈추고 아니라고 말했다. 이건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내가 선택해서 이곳에 온 거라고.
“알아. 당신 탓을 하는 게 아니야. 모든 건 내 탓이야. 그날 그렇게 차를 몰고 나가지 않았다면 그런 사고도 당하지 않았겠지.”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니라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때 노인이 준 시계가 생각났다. 남자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버튼을 누르려 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의 노인을 만났구나. 나도 만난 적 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지만… 지금의 시간을 멈출 수는 없어. 우리는 결국 만날 수 없는 사이야.”
여자는 남자의 품에 시계를 다시 넣어줬다.
“그 시간은 당신을 위해 써야 해. 그 답은 당신이 찾아야 하겠지. 나는… 그냥 지금 당신의 모습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영원히 사랑할 거야. 그리고 당신을 잊지 못할 거야.”
남자가 눈을 떴을 때는 따뜻한 그녀의 체온은 사라진 뒤였다. 집 안에는 혼자 마룻바닥에 앉아 청승맞게 울고 있는 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마룻바닥을 손바닥으로 짚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째서 시계의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가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원하는 아내를 만났는데 왜! 어째서!
한참을 울던 남자는 울음을 그쳤다. 그는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여전히 우주인지 밤하늘인지 모를 곳의 별들은 반짝였다.
아내는 나를 위해 시간을 쓰라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일까? 만약 아내도 나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다면 시계 버튼 누르는 걸 막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분명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남자는 어쩌면 내가 미쳐버려서 환영을 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체온과 향기는 잊을 수 없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터벅터벅 길을 걷던 남자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들어왔다. 시계를 고치고 있는 노인. 그는 노인이 앉아 있는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 그때 그 사람이구려. 이리 와서 앉구려.”
노인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남자에게 손짓했다. 남자는 의심 가득한 눈을 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노인 혼자 사는 곳이라 대접할 것도 없고 미안하구려.”
노인은 고치던 시계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는 남자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마 놀랬을게요. 그 누구도 한 번 이상 만나본 적이 없는데 내가 보였으니.”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이 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노인이오. 나를 부른 명칭이 따로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다들 나를 시간의 노인이라고 부를 뿐이오. 이곳에 온 영혼들은 꼭 한 번은 나를 만나게 되어있소. 당신도 예외는 아니었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했던 것처럼 그 시계를 줬소. 아, 물론 모두에게 그 시계를 주는 건 아니오.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시계를 가질만한 영혼에만 줬소. 어찌 됐든 난 당신에게 시계를 줬고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소. 아니, 그 이전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시계를 받았던 사람들 모두 나를 다시는 만날 수 없었소. 그렇다는 이야기는 모두 그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는 거요.”
남자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그럼 아내를 만나게 한 것도 노인이 한 일이냐고 물었다.
“물론이오. 당신 자력으로는 아내를 절대 만날 수 없소. 아마 아내도 이런 사실을 몰랐겠지만, 그래서 단순히 죽으면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겠지만 죽음에도 종류가 있소. 당신은 자살한 영혼. 즉, 타락한 영혼이오. 아내하고는 절대 만날 수가 없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보고 싶어 그 시계를 주고 아내를 만나게 했소.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은 그 시계의 버튼을 누르지 않았소. 누를 시간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오. 그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버튼을 눌렀소. 심지어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시계를 뺏은 사람을 구타하면서까지 뺏어 눌렀단 말이오.”
남자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 시계는… 일종의 내가 행하는 시험이자 시련이오. 그리고 지금껏 아무도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없었소. 하지만 당신은 그 시험을 통과했소. 분명 시험이라고 했으니 상이 있을 테고… 그러면 상이 뭔지 궁금할 거요. 아내를 만나게 해주나? 영원히? 또는 복수하게 해주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이 세계도 법칙이라는 게 있고 나 역시 높으신 분 밑에서 일을 할 뿐이오. 하지만… 내가 법칙 좀 살짝 어겨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윗분들도 크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것 같소. 눈 좀 감아주면서 내 은퇴 선물이라고 생각하시겠지. 안 그렇소?”
말을 마친 노인은 자신의 조끼 주머니에 들어있던 회중시계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집 밖을 보라고 남자를 향해 턱을 살짝 들어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쳐다봤다. 맞은편 집 창문에 익숙한 뒷모습의 여인이 보였다. 분명 아내였다. 남자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의 팔목을 지그시 잡고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남자는 맞은편 집과 노인을 번갈아 보다가 몸을 돌려 노인을 향해 앉았다.
“말했지만 당신은 절대 아내를 만날 수 없는 영혼이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요. 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이곳의 임무를 성실히 한다면… 글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날게요. 난 그렇게 생각하오.”
노인은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린 외투를 손으로 탁탁 먼지를 털어내고는 입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모자걸이에서 모자를 머리에 쓰고는 남자를 향해 돌아보고 말했다.
“이제 내가 이 집을 나서면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오. 즉, 나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관리하는 거요. 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요. 이곳은 그런 곳이니까.”
노인은 모자챙을 잡고 고개를 살짝 내리며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창문 밖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는 이 세계의 관리자가 됐다. 남자는 과연 아내를 만나게 될까? 그놈에게 여전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남자의 맞은편 집에는 긴 생머리를 하고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젊은 여인이 살고 있었고 여전히 초침이 움직이는 회중시계를 책상 위에 둔, 창문 밖을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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