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닷컴 | 소설 읽기
기억 교감
우리 집은 대대로 내려오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바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아무의 기억이나 가져올 수 있는 건 아니고 같은 능력이 있는 사람의 기억만 가져올 수 있다.

언제부터 이런 능력이 생겨나고 알게 됐는지는 모른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으며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더 오래된 조상 할아버지도 그랬다.
내가 여기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라고 예를 들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능력을 지닌 부모의 자식이라면 남녀 구분 없이 물려받았지만, 본인들의 의지대로 기억을 받았기에 모든 형제가 다 부모의 기억을 물려받는 건 아니었다. 대게는 딸보다 아들이 부모의 기억을 물려받는 편이었다.

어릴 때는 이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나의 경우 이 능력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 아버지였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그런 이야기 자체를 믿지도 않았겠지만 어린이에게 어른의 수준 높은 기억을 줘봤자 별 소용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기억을 주려는 주체와 받으려는 주체 모두 마음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해도 기억은 가져올 수 없다. 그러니 천방지축 어린이에게 기억을 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려주고 나에게 기억을 전달했을 때는 내가 막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섰을 때다. 나는 그때 한참 사춘기여서 부모님께 반항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사고를 더 치고 부모 속을 얼마나 더 썩일까 고민하는 철없는 아이였다.
그날도 집에 늦게 들어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근엄한 얼굴로 앉아 계셨고 나를 불렀다. 나는 또 무슨 잔소리를 늘어놓을까 싶어 세상의 온갖 싫은 걸 다 짊어진 얼굴로 거실 중앙에 앉았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으시더니 입을 여셨다.

“동민아. 아버지 손 좀 잡아봐라.”

뭐지? 갑자기?

“아버지 너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다. 그냥 아버지 손 좀 꼭 잡아봐라.”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릎을 기어 아버지 앞에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손을 잡아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릴 때는 그렇게 아버지 손을 잡고 마트도 가고 놀이 공원도 가고 그랬는데 말이다. 투박하고 거칠한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눈을 감았고 나에게도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아버지 손을 느끼고 마음을 열라고 했다. 마음을 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하라는 대로 했다.

나는 속으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부모님이 어디서 자식을 손쉽게 혼내는 법이라도 배워오셨나 생각했다. 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나는 큰 숨을 내뱉고 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생각했다. 그 순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깜깜했던 머릿속에 어떤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엄청 뚜렷하거나 형형색색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말로 설명하기 몹시 어렵지만 그나마 비슷하게 설명하자면 흑백 TV를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 형상들은 내가 마치 겪은 일처럼 그 느낌만은 생생했다.

나는 너무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리에 주저앉았고 잡고 있던 아버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엄청난 것을 봤을 때의 놀란 표정을 짓고 뒤로 물러섰다. 아버지도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지금 네 머릿속에 들어간, 마치 지금 네가 겪었던 것처럼 느낀 그 기억들. 그게 아버지 기억이란다.”

나는 아버지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너무 말을 듣지 않아서 부모님들이 나에게 무슨 최면을 거는 줄 알았다.

“놀랐을 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머니, 그러니까 네 할머니가 내 손을 처음 잡아 주셨을 때가 기억나는구나. 그때 어머니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나에게 보여주셨는데 나도 똑같이 너에게 학창 시절을 보여주게 되는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물론 일부의 기억을 너에게 전달해 준 것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기억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다. 나도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무척 놀랐었지. 내 어머니, 그러니까 네 할머니의 학창 시절은 무척이나 고되고 혹독한 시절이었단다. 말로만 전해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그 고통까지 느낄 수 있었어. 그리고 너 또한 나의 학창 시절을 조금이나마 몸소 느끼게 된 거지. 그런데 말이다. 만약에 네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는데 좋은 학창 시절을 보여줄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니. 물론 기억을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는 것은 너의 자유란다.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숨길 수도 있고 아무런 기억도 전달해 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국 내가 어머니의 능력을 알게 되고 이어가게 된 것처럼 너 또한 자식에게 이 능력을 보여줄 날이 오게 되겠지. 하지만 인생에서 좋은 기억이 단 한 개도 없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지금껏 보고만 있으셨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엄마가 처음에 아빠와 결혼할 때는 이런 능력이 있는지도 몰랐어. 물론 아빠가 말을 했어도 믿지 않았겠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지금도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는 걸까? 의심할 때가 많아. 하지만 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빠 손을 꼭 잡고 기억을 전달해 주셨을 때의 아빠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단순히 당신의 어머니가 곧 돌아가시겠다고 생각한 얼굴이 아니었지. 물론 슬픔이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편안함이 느껴졌어.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셔도 생생하게 그녀의 인생을 기억할 수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게 느껴졌지. 물론 엄마도 할머니가 아빠에게 얼마나 많은 기억을 주셨는지 몰라. 이건 당사자만 알고 있을 테지. 아빠도 엄마한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아. 설사, 한다고 해도 엄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아빠가 하는 이야기가 기억으로 받은 이야기인지 단순히 할머니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여기서 중요한 건 인생을 전달해 줄 수 있다는 거야. 살면서 자식에게 행복했던 기억을 전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니겠니. 우리는 너에게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이런 능력을 알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금만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라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았으면 해. 그게 엄마 아빠의 마음이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방에 들어갔고 한 일주일을 부모님과 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나의 사춘기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때의 일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끝났어야 할 사춘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신 차리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했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의 기억을 받은 후로는 더는 아버지의 기억을 받지 않았다. 아버지도 애써 자신의 기억을 주려고 하지 않으셨고 나 또한 굳이 아버지의 기억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둘 다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아버지의 기억을 받아야 하는 날은 그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중년의 나이를 넘어갈 때 즈음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병원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가족을 불러 세웠고 작별 인사를 할 때가 왔다고 하셨다. 가족들은 무슨 말씀이냐고 노발대발했지만 아버지는 매우 덤덤하셨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셨다.

“동민아… 내가 왜 너를 부르는지 알겠지?”

나는 아무 말 없이 침대 옆에 서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네 누나는 결국 받지 않겠다더구나. 그래, 이것 또한 너희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인데 거스를 수 있다면 거슬러 가야지.”

나는 아버지 옆에서 미소 짓고 서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아비는 절대 탓을 하지 않아. 그러니 너의 뜻이 제일 중요하단다. 이 시간이 지나면 좋든 싫든 내 기억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간 내가 말하지 않을 걸 알게 될 수도 있고 이 아비를 다르게 볼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저 또한 아버지를 탓하지 않을 거고 의심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기억을 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아버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셨고 눈을 감으셨다. 나도 눈을 감았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에게 기억을 처음 받았을 때의 느낌이 다시 들었다. 엄청난 기억이 아버지의 손을 타고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구역이 나뉘어 내 기억, 아버지 기억 이렇게 쌓이는 듯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앞은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는 손을 내려놓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한 번 쓰다듬고 이불 안으로 넣어 드리고는 돌아서서 병실 밖을 나왔다. 절대 울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기억을 받았으니 오히려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병실 앞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차라리 기억을 받지 말 걸 후회도 밀려왔다. 기억 때문에 아버지 생각이 더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병실 앞에서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일주일 뒤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장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자기 전에 아버지의 기억을 조금씩 기억했다. 아버지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한둘씩 눈에 보였다.

집에 오면 항상 조용하고 과묵한 분이셔서 언제 행복했는지, 그리고 언제 기분이 좋았는지 그런 기분을 헤아릴 수도 없었는데(어쩌면 그냥 내가 무심한 놈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이제야 아버지의 기분을 알게 됐다. 그렇게 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리고 어떤 기억에서 멈췄다. 아버지가 아기를 두 손으로 들고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어떤 여자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어머니인가? 그럼 저 아이는 나? 아니다. 어머니가 아니다. 분명 어머니가 아니다. 기억을 좀 더 더듬어갔다.

아버지의 기억에 그 여자는 자주 나타났고 아이도 점점 커갔다. 여자는 활짝 웃는 얼굴로 아버지를 맞이했고 아이도 좋아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렇게 가정적이셨던 우리 아버지가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건가? 게다가 애까지 낳고?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기억을 다시 더듬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여자였고 그 여자를 만날 때마다 행복하고 점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이 떨리고 이가 떨렸다. 하지만 더 정확한 게 필요했다. 나는 과거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만난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만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분명한 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고 이 기억을 전달해 주신 거였다. 만약 끝까지 숨길 기억이었다면 나에게 전달해 주지 않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나는 기억에서 아버지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기억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번호가 그 여자에게 거는 번호라는 것도 찾아냈다. 다음날 나는 기억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중후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혹시… 김일영 이라는 성함을 가지신 분을 아시나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거시는 분은 그분의 아드님 되시죠?”

나는 뜻밖의 대답에 놀랐다.

“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하고 물었다.

“그분이 누군가 자기 이름을 대고 저를 찾으면 아들일 거라고 했었어요. 그리고 지금 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건… 그분이 아프거나 돌아가셨다는 소리겠죠….”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지?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저희 아버지하고 어떤 관계 신가요?”

나는 뱃속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분노 같은 것을 억누르며 물었다.

“말하자면 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지금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니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듣고 싶으시면 시간을 내서 뵙기로 하죠.”

나는 의문의 여자와 약속을 잡고 그날만을 기다렸다. 물론 가족 누구에게도 이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알아야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말하지 않거나.

약속한 날 작은 카페에서 그 여자를 만났다. 내 어머니뻘 되는 나이로 보였다. 우리는 차를 시키고 아무 말도 없이 찻잔만 바라봤다. 이 정적을 깬 건 나였다.

“네, 제가 연락할 것도 알고 계셨고… 저희 아버지와의 관계도 부정하지 않으셨고…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죠.”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했다.

“그분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언젠가 말해 줬어요. 그리고 그 능력으로 아들이 우리의 관계도 알 거라는 이야기도 해줬지요. 사실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을 했지만 정말 그랬던 거 같네요. 아버지와 나는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분이 우리가 어떻게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는 말해 주지… 아, 말해 주는 게 아닐 수 있지만 내 상식에서는 말해 준다고 할게요. ‘말해 주지’ 않았나 보네요. 이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아버지가 젊었던 시절로.”

나는 차분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나도 남편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젊었을 때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동료 직원이 내 남편이었지요. 둘은 사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일도 잘했지요. 촉망받는 젊은이들이었어요. 그러다 외국으로 파견을 나가게 됐어요. 당시 우리 사이에는 갓 낳은 아이가 있었는데 남편은 외국으로 나간다며 무척이나 좋아하면서도 걱정했죠. 하지만 같이 가는 동료가 아버지여서 외국 생활은 걱정하지 않았어요.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했죠. 그렇게 둘은 신기술을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죠. 기계가 오작동해서 사고를 당했다고 들었어요. 다행히 그쪽 아버지는 괜찮았죠. 그렇게 아버지는 외국 생활을 끝마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저를 찾아왔어요. 다짜고짜 내 앞에 무릎을 꿇더군요. 저는 영문을 몰라 어쩔 줄을 몰랐어요. 동료가 그렇게 죽어버린 대에 대한 슬픔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에게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더군요. 기계 오작동이 아닌 자신의 실수로 그렇게 된 거라고. 회사에서는 사고로 처리했지만 자신의 실수로 죽은 거라고. 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이냐고 따졌죠. 아버지는 울며 대답했어요. 맞다고. 그게 진실이라고. 하지만 숨길 수 없었다고. 안 그러면 그 죄책감에 자신도 죽을 것 같았다고. 그리고 그럴 수도 없었다고.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진실을 말하고 죽고 싶었다고.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한 후로 나는 한동안 미친 여자처럼 살았어요. 아버지는 매일 나를 찾아와 용서를 빌었지만 용서할 수 없었죠. 하지만 나는 결국 아버지를 용서했어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죽음으로 이 모든 걸 끝내려 했겠죠. 나는 회사에서 나오는 보상금으로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어요. 아이가 클 때까지 뒷바라지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아버지는 나를 찾아와 힘든 부분들을 도와줬어요.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며. 아버지가 설명했던 대로 기억을 주는 능력이 있다면 아마 그 기억들이 보였을 거예요. 나와 내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커가는 모습들.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아끼는 모습들. 네, 하지만 아버지도 그 기억들에 대한 진실을 결국 아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네요. 차마 그것까지는 보여줄 수 없었나 봅니다. 평생을 속죄받아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아들에게 떠안기고 싶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해해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거짓말일 수도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들통나니 이런 시나리오를 들고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아버지는 분명히 이 사실을 나에게 전달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이런 수고스러움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이 여자와의 관계만을 보여주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만한 기억을 전달해 주지 않았을까? 자신이 평생 겪은 고통과 참회를 전달해 주지 않기 위해? 그래도 용서를 받고 한 가정을 지켜줬던 기억이 더 행복했기에? 잘 모르겠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결국, 내 아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독립을 할 수 있을 때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이제 그만하셔도 된다고. 우리 가족에게 이제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이만큼 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 후로도 가끔 찾아와서 안부를 묻고는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더군요. 직감했어요. 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구나. 그게 몸이 아파서인지 이 세상을 떠나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구나. 그래요. 이제라도 죄책감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라고 마음속으로 전했죠.”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커피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 여자라면 아버지가 왜 진실은 전달해 주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셨을까요? 굳이 이 사실을 왜 저에게 알려주셨을까요? 무덤까지 가져갔으면 아무도 모를 일을 말이죠.”

나는 정말 궁금했다. 혹시 아버지가 어떠한 말을 남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요. 나도 자식이 있는 부모지만 그게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요? 적어도 자식에게 부끄러운 부모가 되지는 않기 위해. 하지만 자신의 아픈 기억들까지 전해주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웠겠죠. 단순히 말로 전해주는 이야기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게 기억을 받아서 그 사람의 고통까지 느낄 수 있다면 나라도 그런 기억은 자식에게 주지 않았을 거예요.”

명쾌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 좋은 대답도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찌 됐든 지금 내 앞의 여자가 진실을 이야기했든 거짓말을 이야기했든 여자와의 관계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고 그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나도 믿어야 했다. 정말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면 이런 기억조차 나에게 전달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는 자신이 떳떳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고 파악한 상황이다.

나는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좋은 부모인가. 내가 자식에게 물려줄 기억이란 무엇일까? 아버지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니, 아버지의 기억을 용기라 할 수 있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을 기억으로 남겨 주신 아버지마저도 말이 없다.

오늘 밤은 쉽게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기억 사이에서 긴 밤이 될 것이다.
* 본 소설은 창작자의 저작권 보호를 받으며 위반 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5
0
댓글 말풍선을 누르면 댓글을 달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